세련된 건 다음날 기억이 안 나거든
서울 아트북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새로 발견한 취향.
스탠드포인트 2025년 12월호 ‘겨울방학’ 편에 실린 아티클을 재구성한 글입니다. 한 호에는 여러 아티클이 함께 실리지만, 매거진 홈페이지에는 하나의 아티클만 공개됩니다. 전체는 실물 매거진과 e-book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공항 카운터에서 수하물 무게를 재는 그 긴장의 시간. 여행 첫 날에는 가벼웠던 스탠드포인터의 캐리어를 무겁게 만드는 범인은 무엇인가요. 기념품? 옷? 저는 현지 간식 약간, 그리고 새로 산 책들이 범인.

다행히 수하물 무게 걱정 없이 양손 무겁게 돌아올 수 있는 방앗간에 다녀왔어요. 아트북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이 지난 달(2025년 11월) 서울에서 열렸습니다. 책을 사랑하는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독립 출판물과 아트북을 선보이고 판매하는 행사인데요. 책과 종이, 자유로운 창작물을 좋아하는 저는 이 날만을 손꼽아 가며 기다렸습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읽었나! 함께 모험을 떠나 봅시다.
최고의 부스 TOP 3
@monmonpress


나도 이런 멋쟁이 할머니 될래. 결심하게 했던 일본에서 오신 한 그림책 작가님. 출판물은 6권 남짓, 대부분이 여행기였어요! <홋카이도 52세 차 두 사람의 여행>. 손자와 함께했던 여행기 이름을 이렇게나 센스 있게. 책 내용은 일본어지만 앞면의 QR코드를 찍으면 한국어 번역본이 뜹니다.

@meadowandroom
이런 꽤나 규모가 있는 행사에서 아는 사람을 마주쳤을 때, 내향인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나요. 바로... 경로 수정.
반가운 마음이 드는 동시에 방향을 살짝쿵 바꾸게 됩니다. 절대 그분이 싫은 게 아닙니다. 그저 몸이 반응할 뿐. 마침 이곳에서 타이페이 아트북페어에서 만났던 한 디자이너분을 마주쳤어요. 그런데 이 내향형 인간이 본능을 이겨 내고 용기 내어 말을 걸었다는 거 아니겠어요. 당시에 그 작가님의 조그만 아트북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구입했었거든요.


“저 작년에 타이페이에서 이 책 샀어요!” 휴대폰부터 꺼내서 그때 산 책 사진을 들이밀었습니다. 우아함이라고는 없는 접근. 작가님은 깜짝 놀라시더니 정말 반갑다고 하셨어요. 알고 보니 이번 서울이 첫 해외 북페어였대요. 타이페이는 홈그라운드였고, 처음으로 국경을 넘어 나온 자리에서 작년 손님을 다시 만난 것. 말 걸길 잘했다.

‘리소프린팅’이라는 독특한 색감과 질감의 프린트 방식으로 다양한 작업을 하는 중!
@kikietyoyo

종이가 아닌 도자기 표지를 붙인 세상에서 제일 매끈매끈한 책. 프랑스어와 영어, 한글이 자유롭게 섞인 귀여운 이야기들! 친구와 저는 한눈에 이 부스와 사랑에 빠졌어요. 프랑스 베르사유에 오래 거주하며 예술 활동을 이어오는 한국인 분이셨어요.
(p.s. 우연히 마침 프랑스로 이사 온 2026년 7월의 정은은 @kikietyoyo와 친해졌다는 얘기.)

스탠드포인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깔끔하고 모던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믿어왔는데, 페어가 끝나고 휴대폰 갤러리를 열어 보니 부스에 붙어 있는 삐뚤빼뚤 손글씨들만 200개 찍어 뒀더랍니다.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치고 '멋지게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요.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련되고 예쁜 결과물을 만들어내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매끈하게 잘 정돈된 창작물들은 돌아서는 순간 신기하리만치 머릿속에서 빠르게 날아가 버려요. 왜? 핀터레스트만 켜도 완벽한 레퍼런스들과 깔끔한 그래픽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니까요.
물론 세련됨을 아주 깊이 있게 구현한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독보적인 개성이 됩니다. 하지만 어중간하게 안전한 길만 따르다 보면 결국 어디서 본 듯한 복사본만 남아요.
스탠드포인터, 우리가 만드는 무언가가 세련됨을 넘어 단 하나뿐인 '원앤온리'가 되려면 이제 어떤 부분을 더 재밌게 다듬어야 할까요? 겉보기엔 흠잡을 데 없지만 다음 날이면 잊히는 것들 사이에서 문득 고민을 시작해 봅니다.



세상에는 어떤 북페어가 있을까 (2026 ver.)
책과 여행을 사랑하는 스탠드포인터라면 이 달력을 캡처해 두길! 언젠가 여행 일정과 겹친다면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날지도 모르잖아요.

큐레이션 기준 : 개성 있는 창작물이 모이고, 규모와 국제성이 일정 수준 높은 곳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