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집? 진짜 인생?
스물아홉, 파리에서 '진짜 삶'이 찾아왔다.
벌써 6년 차. 일상 브이로그를 꼬깃꼬깃 편집해 가며 유튜브에 업로드한 지 이렇게 오래되었습니다. 그동안 저에게 생긴 변화를 하나 말해 보자면요. 화면 밖 누군가에게 제 24시간을 공유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매일 무엇을 저녁으로 먹고, 어떤 영화를 고르고, 무슨 고민을 안고 있는지요.
그런데 훌쩍 파리로 바다 건너오고 나니, 이제는 카메라를 켜는 일이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네요. 태엽을 돌려 감은 것처럼 제 몸과 마음이 유튜브를 하기 전으로 도르륵 원상복귀한 느낌이에요. 파리에 발 딛고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쳐내다 보니... 브이로그 그거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프리랜서로 혼자 일을 하다 보니 이곳에서의 하루는 대체로 서울에서와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거리로 나가면…
- 아는 사람과 마주칠 일? 전혀 없음.
- 거리에서 한국어로 아무 말이나 해도 알아듣는 사람? 아무도 없음.
- 내 24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아는 사람? 노바디.
카메라를 잘 켜지 않으니 제 일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아무도 모르게 되었어요. 가장 친한 친구도 비행기로 12시간을 날아와야 제 방에 도착할 수 있을 만큼, 삶이 어마어마하게 프라이빗해졌습니다.

이게 좋냐 싫냐 물어보신다면.
정말 좋습니다! 지금까지는요.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일상을 6년 만에 가져보는 기분이에요. 써놓고 보니까 무슨 대단한 연예인이 할 법한 말 같네요. 하지만 이 매거진에서는 제일 솔직해지고 싶으니까요. 일상이 콘텐츠가 된다는 것은 재밌고 신나는 일이지만 가끔은 지치기도 합니다. 피로가 쌓인 줄도 몰랐는데 이곳에서의 개인적인 삶이 시작되니 이제야 그간의 피곤함을 알아차리고 바라볼 여력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혼자 외치는 것
재밌는 점은. "와 이 삶 진짜 같다!" 라는 말을 요즘 제가 하고 있다는 거예요. 카메라 안 켜면 아무도 안 들어주니까 허공에 대고
그래, 진짜 내 삶! 이거 진짜야.
한국은 모두가 잠들어 있을, 파리 시각 오후 6시가 넘어가면 더더욱이요. 왜일까요.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와 있지 않아서? 아무도 나에게 성가신 이메일을 보내지 않는 시각이라서? 이곳 파리에서는 누구도 나를 알 리가 없어서?
빌라 케릴로스라는 이상한 세계
사실 이 질문들은 아주 잠시 저를 스쳤을 뿐, 낯선 삶의 방식이 주는 사적인 달콤함에 몸이 노곤노곤해졌답니다. 이 기분이 익숙해질 때쯤 니스로 2박 3일 짧은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운명처럼 어떤 집을 만났어요.

100년 전 프랑스의 한 부유한 역사학자가 2,1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별장을 재현해 지은 곳이었죠. 건축, 인테리어는 물론 먼지 한 톨까지 비슷하게 만든 느낌. 심지어 집 안 책상의 다리를 전부 세 개로만 제작했더라고요.

무슨 말이냐면. 고대 그리스 집은 바닥이 흙이라 울퉁불퉁했어요. 그래서 당시에는 주로 가구 다리를 세 개로 만들었다네요(삼각대가 안 흔들리는 것과 같은 원리!). 그런데 이 집은 바닥이 매끈매끈 대리석 모자이크라 흔들릴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도, 오직 고증을 위해 가구 다리를 3개로 만든 거죠.


그래서 왜 이 집이 기억에 남았다는 거야
끝내주는 디테일이 살아있는 집의 서재를 거닐며 드는 묘한 이 기분. 흠. 아름답고 멋지고 바람 솔솔 불고 좋긴 한데… 이렇게까지 재현해도 이 사람은 진짜 고대 그리스 때의 삶을 못 사는 거라니 뭔가 아쉽다. 당시에 태어났다면 이렇게 재현하려 노력하지 않았어도 그게 일상이었을 텐데. 이 휘황찬란한 집도 결국 진짜가 아니니까, 다른 집을 똑같이 따라 만든 집이니까 슬프기도 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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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스에서 뜨거운 모래를 밟으며 스트레스를 녹이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한 파리로 돌아와서 그 집에 대해 다시 떠올려 보니, 제가 무언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알았어요. 이 집을 만든 사람으로 살아본 적이 한 순간도 없으면서, 그 사람이 아쉬웠을 거라고 마음대로 정해버렸구나. 우리가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해리포터 거리를 돌아다니며 마법 지팡이도 휘둘러 보고, 버터맥주도 한 잔 비운 뒤에, 그 공간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에 슬퍼하나요? 아니죠. 룰루랄라 재밌었다 정도일 뿐이잖아요. 이 집주인에게도 그 집은 그런 것이었을 수 있었던 건데.

이 집을 만든 사람의 마음을 영원히 알 수 없다면, 제가 하나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내' 마음. 제 마음에는 이런 생각이 있었던 거예요.
- 그 집을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고 생각한 것
- 가짜는 왠지 아쉽지 하고 생각한 것
그렇담 제게 ‘진짜'라는 건 무엇일까요. 확실한 건, 그냥 겉모습을 똑같이 만드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거예요. 단순한 겉모습의 복제와 재현으로 이 집이 진짜 집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처럼요.
그러니까 제가 결국 무언가에서 진짜라는 감각을 받는 건, 그 안에 그게 존재해야만 하는 '필요'와 '이유'가 스며있을 때인 것 같아요.
세 발 달린 가구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해 고민 끝에 선택한 당대 최고의 정답이었겠지만 이제 그 답은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넘어온 지 오래. 우리의 삶의 방식에는 네 발 달린 가구가 훨씬 조화로운데, 이유는 사라지고 모양만 그대로 재현된 집에 저는 어쩔 수 없는 가짜의 느낌을 받아버렸던 것.


그래서 이 삶은 진짜일까
진짜라는 것이 그 시절의 이유가 고스란히 스며있고 쓰임새를 갖춘 무언가라면, 아주 아주 사적인 지금 저의 파리 생활을 두고, 왜 저는 이 삶 진짜 같다! 하고 마음껏 외칠 수 있게 된 걸까요.
- 언젠가 완성될 제 하나의 긴 삶에서, 지금 파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이 29살을 지나고 있는 저라는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콘크리트 같은 재료이기 때문일까요?
- 아니면, 가짜였던, 그러니까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제 서울 라이프의 어떤 부분들을 훌훌 털어내 버렸기 때문일까요.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안도감을 내려놓고 지구라는 행성에 사는 그냥 사람 한 명으로 존재하는 시간. 스물아홉 여름을 지나는 저에게는 바로 그 시간이 필요했나 봐요. 그래서 지금이 진짜라고 느꼈나 봐요. 스탠드포인터에게 진짜 삶은 무엇이려나요.

p.s. 누군가는 낭만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저에겐 가짜같았던 그 집. 그런데도 말도 못하게 아름다웠다는 건 부정할 수 없네요. 니스에 들르는 여행자 스탠드포인터라면 이 '빌라 케릴로스'에서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해 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