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책장에 진짜 사람이 있을까?
없는 줄도 몰랐던 것을 발견하는 순간. 그것이 여행의 묘미!
베벌리힐스를 떠나며 받은 선물
오늘은 작년에 떠난 미국 서부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LA에서 머문 4일 동안 친구와 저는 아름다운 베벌리힐스의 한 저택에 딸린 작은 집에서 지냈는데요. 여행의 피곤에 절여진 나머지... 저희는 숙소에서 널브러져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종종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별채에 난 커다란 창을 통해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집주인 할머니의 취향과 일상도 조금씩 알게 됐어요.

커다란 수영장 표면 위에 동동 떠 있는 나뭇잎을 치우고, 정원의 풀과 꽃에 여유롭게 물을 주는 모습. (ON 운동화를 신고 주신다는 게 포인트.) 꿈같이 멋진 서재도 인상적이었지만, 자꾸 눈길이 가는 건 여유로운 태도와 저까지도 편안해지는 웃음이었어요. 에어비앤비 앱에 적힌 그녀 이름은 데보라, 직업은 작가!
허걱. 나도 작가...는 아니지만 국문학을 전공했고 글도 쓰는데! 갑자기 그녀가 제 롤모델로 급상승했습니다. 우리는 에어비앤비 앱으로 채팅을 나눴어요. 내향형인 저 대신 친구가 운을 뗐지만요. "내 친구가 너 책 궁금하대! 어떤 책 썼어?"라고 하니 그녀의 말. "너희 가는 마지막 날에 내 책 선물로 줄게!"
심장이 뛴다... 데보라는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일까요. 어떤 생각을 하며 삶을 살까요. 왠지 판타지 소설 작가일 것 같아요. 화창한 체크아웃 날 아침, 데보라는 양장으로 된 두꺼운 책을 저에게 하나 건넸어요. 앞장에 사인도 받았어요. 제게 하고 싶은 말도 하나 적어주세요! 하고요.

마지막 인사를 하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해야 했던 나머지, 책을 바로 펼쳐보지 못하고 여행을 마무리했어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 첫 장을 열어본 저는 몇 페이지 못 가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책을 덮어 버렸어요.
이 책은 세계적인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가 쓴 편지·일기·회고록을 바탕으로 그녀의 젊은 시절을 재구성한 전기였어요. 은밀한 연애편지부터 동시에 여러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고민까지 날것 그대로 실려 있었습니다. 이 책은 뭐지? 누군가의 사생활을 밝히는 책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읽히는 거지?
이 당황스러움도 문화 차이일까
남의 사생활을 소비한다는 어색함과 죄책감이 먼저 들었어요. 제가 익숙했던 인물 이야기에서는 보통 그 사람이 무엇을 이루었는지가 중요했거든요. 사적인 고민이나 연애 이야기는 인물의 업적을 향해 가는 길에 잠깐 등장하는 장애물 정도였을 뿐. 놀란 마음에 책을 덮었지만 그다음 내용이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시 읽기 시작한 이 책은, 재미있게도 그런 복잡함 자체가 이야기로 쓰여 있는 책이었어요. 누구를 사랑하는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러고도 왜 마음이 달라지는지. 훌륭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향해 이야기가 나아가지 않아도, 한 사람의 아주 진솔한 감정과 삶이 이렇게 서사가 될 수 있구나. 그것이 픽션 속 인물이 아니라 실제 세상을 살아간 사람의 이야기여서 더더욱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서사 논픽션(narrative nonfiction)! 실제 인물과 사건을 바탕으로, 소설처럼 이야기를 풀어 가는 장르랍니다.

우리 책장 안에는 없었던 커다란 가능성
숫자로는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의 도서 공식 분야 13개 가운데 ‘서사 논픽션’은 별도 항목이 없고, 전기와 회고록이 주로 포함되는 ‘역사’ 전체도 3.2%, 약 2천 종에 그칩니다. 물론 서사 논픽션 일부는 에세이나 사회과학으로 흩어져 있을 테니 3.2%를 곧 이 장르의 정확한 몫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정확히 셀 수조차 없이 여러 서가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 한국에서 독립된 장르로 자리 잡지 못했다는 증거에 가까워요.
그렇다면 이 낯선 장르만의 재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책을 만든 데보라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이것이지 않을까 합니다. 사방에 널린 파편 같은 기록들을 모아 독자가 끝까지 읽게 만드는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하는 작가의 기획력. 편지와 일기 같은 날것의 재료를 가지고, 사실을 확인하고 맥락을 살펴 소설만큼 흥미진진한 비문학으로 엮어 내는 일종의 고난도 디렉팅 능력!
미국에는 이런 책을 만드는 작가를 지원하는 제도도 있을 정도라고 해요. 뉴욕시립대 대학원의 ‘레온 레비 전기 센터’는 선발된 전기 작가에게 9개월 동안 7만 2천 달러의 지원금과 개인 집필 공간, 연구 보조까지 제공해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삶을 오래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돈과 시간과 장소를 마련해 주는 거예요.
계속 탐험해야 하는 이유
책 한 권을 선물받았을 뿐인데, 제게 익숙하지 않았던 이야기 방식을 하나 알게 되다니! 베벌리힐스에서 이런 새로운 배움을 얻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더욱 기뻤습니다. 처음에는 데보라의 여유로운 일상이 부러웠는데 이제 그녀가 글을 쓰는 방식이 궁금하고 알고 싶어졌어요. 무엇을 모르고 있었는지조차 몰랐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의 놀라움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기분이기도 해요.
그렇다면 서사 논픽션 장르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많이 읽히고 있을까요. 한 가족의 살인 사건을 따라간 트루먼 커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 한 여성의 세포가 현대 의학을 바꾼 과정을 추적한 리베카 스클루트의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등이 있어요(두 책 모두 국내에도 번역되었지만, 서점에서는 각각 소설, 의학 분야로 흩어져 있어요).
이 책들의 핵심은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무엇을 원했고 어떤 선택을 했으며 그 뒤에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장면으로 보여 주는 거예요. 데보라가 마가렛 미드의 업적보다 편지 속 망설임과 욕망을 고른 것처럼요.
계속해서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낯선 영역에 고개를 내밀어 보고 싶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게 익숙한 세상이 전부는 아니라는 걸 이렇게 뜻밖의 만남을 통해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침 데보라가 책 첫 페이지에 적어 준 한마디도, 바로바로!

p.s. 책 제목은 <Coming of Age: The Sexual Awakening of Margaret Mead>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