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5일 전, 노트북 품에 안고 혼자 비행기에 오른 이유

나도 디지털 노마드로 살 수 있을까? 프리랜서 에디터의 치앙마이 홀로 여행기 ①

Share
마감 5일 전, 노트북 품에 안고 혼자 비행기에 오른 이유

아주 작은 독립 매거진 '스탠드포인트'를 혼자 시작하고 운영한 지 1년이 되던 시점. 기분이다! 스카이스캐너를 뒤적여 비행기 티켓을 결제했습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굳이 1주년을 기념할 필요는 없었지만 또 떠나고 싶은 맘 에 달콤한 명분을 한 스푼 추가한 거예요. 왜냐고요? 그럴듯하게 외국에서도 일해 보고 싶었습니다. 나도 호텔 라운지에서 노트북 열어 두고 뜨거운 커피 한 모금 하고 싶으니까. 커리어 우먼처럼.

여행이라면 어디든 절대 마다하지 않는, 동시에 일이라면 끝내주게 잘하고 싶은 제게 '디지털 노마드'라는 단어는 반짝반짝 빛나 보였습니다. 데드라인 깜빡한 프로젝트가 머릿속을 번뜩 스쳐서 여행 중에 친구 앞에 앉혀 두고 급하게 해치우는 그런 일 말고. 진짜로 일이랑 여행을 하나로 합쳐 만든 '디지털 노마드'라는 어른스러운 단어가 저에게도 자연스러웠으면 했습니다.

1-3일차에 머문, 아늑하고 조용한 숙소. @inn oon villa

어디로 가는 티켓?

태국 치앙마이. '디지털 노마드'들이 모이는 성지 같은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저의 첫 노마드 라이프 도전이 순탄했으면 하는 마음에 여기로 결정.

치앙마이는 편하게 머무르며 유유자적 여행하기 좋다고들 했습니다. 혼자 여행 난이도 '하'! 우선, 공항에서 도심이 10분 남짓 아주 가깝습니다. 올라가는 심박수를 못 본 척하면서 도심까지 1시간 걸리는 기차를 '제대로 탔나...' 몇 번이나 확인하며 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모두가 친절하고, 영어도 잘 통하고 사원, 카페, 로컬 음식이 가득한 곳!

혼자 여행이라면 살짝 긴장되기는 하지만 문제는 없습니다. 거친 자유의 도시 필라델피아 출신인 저(교환학생으로 달랑 4달 반 있었지만... 용기가 필요한 순간엔 꼭 이 말을 꺼냅니다). 당시 미국의 다른 도시로 혼자 훌쩍 자주 떠나기도 했었고, 로스쿨을 그만둔 직후에는 3주 동안 스페인에서 5개 도시를 옮겨 다니며 혼자 여행하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말했듯이 이번 여행은 디지털 노마드로 떼는 첫발입니다. 여행뿐만 아니라 일까지 멋지게 완수해야 성공이라는 말.

마음에 들어서 스무스하게 끼워 넣는 내 사진. 셔츠 @dunst

타기만 하면 기분이 이상해지는 버스

어느새 3년째 살고 있는 제 동네 광진구는 인천공항과는 꽤나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로 직행 공항버스를 타는데, 차가 안 막히는 새벽에는 한 시간, 막히면 두 시간 반이 넘게 걸리기도 하는 예측 불허의 버스입니다.

아무렴 공항버스가 느릿느릿 기어갈 때 비행기를 놓칠까 걱정하는 것만큼 숨 막히고 무서운 일은 없기에 오늘은 최대한 여유롭게 버스에 탑승해 봅니다. 차창 밖을 멍하니 감상하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이미 여행이 시작된 것 같은 기분!

외국어가 벌써부터 들리기 시작하는 이 버스 안에서는 익숙한 것도 낯설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와아. 한강이 이렇게나 넓었지! 스무 살 처음 상경하기 전까지 이렇게 넓은 강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기 멀리 여의도 빌딩숲이 보이네요. 아 맞다. 여의도가 제게는 서울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대구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던 9살 정은이 말이에요. 걔한테는 여의도가 서울의 상징이었어요. TV 속 서울의 모습에서 여의도가 빠졌던 적은 없었으니까요. 가짜 섬이라는데 정말인지. 어른들이 장난치는 건지 알 수 없는, 방송국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커다란 서울에 대한 로망을 방울방울 만들어 주던 그 섬. 내가 더 큰 세상을 꿈꾸게 해주던 그 섬. 시간이 흘러 흘러 그 섬이 이제 저에게는 그저 익숙한 서울의 한 장면에 불과해졌습니다. 제법 어른이 된 기분과 동시에 헛헛한 이 마음은 뭘까!

인천공항 게이트. 아주 좋습니다! 한적할 때만.

제법 그럴듯한 시작!

한국의 자랑. 쾌적한 인천공항을 걷고 또 걸어 게이트에 도착한 다음, 구석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켰습니다. 매거진 원고를 뜯어 가며 수정하던 중 괜히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촌스럽지 않게 자연스럽게 슥 훑어봅니다. 근처에 코딩을 하거나 강의를 듣는 외국인들이 몇몇 있습니다. 어머, 나 외국 가나 봐. 이제 탑승이 시작됐습니다. 자리를 찾아 앉은 다음 얼른 휴대폰을 켜 후다닥 음악을 몇 곡 다운로드 받았습니다. 아까 미리 다운받을 걸. 제발 다운 다 받을 때까지 LTE 잘 터져라!

내가 급하게 고른 앨범 하나는 John Mayer의 ‘Quiet’라는 곡이 수록된 옛날 앨범. 와, 이거 제가 두 살 때 나온 앨범이라네요. 10년째 그의 팬인 제가 모르는 노래는 정말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신나게 유튜브 서핑을 하다가 이 곡을 보물처럼 발견해냈습니다(쓰라는 원고는 안 쓰고). 보석을 찾아낸 탐험가의 기쁨이 이런 걸까요! 차분하고, 기타 선율이 깔끔하면서도 포근합니다. 야호. 풋풋한 자유로움이 느껴집니다.

급한 마음에 AI의 도움을 받아 보려 했으나 되려 손만 많이 가서 울적해졌다네요.

여행 0일차의 기쁨

비행기 마지막 바퀴가 무사히 활주로에 닿았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곧장 첫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태국 땅에 비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우산은 캐리어에 넣어 뒀는데... 꺼낼 엄두가 안 났습니다. 모르겠다! 그냥 캡모자를 뒤집어쓰고 택시 픽업 장소까지 마구 뛰었어요. 내 옆을 지나가던 아저씨가 “아- 비가 와서 별로 안 더운 거야!” 하십니다. 음, 그런 것 같기도. 그렇게 생각하니 이 비가 썩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기도.

국문과의 심장이 반응하는 단어 'literature'. 각자 이런 단어 하나씩은 있잖아요.

겨우 잡아 탄 택시 덕분에 자정이 되기 직전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런 나를 위해 주인장이 우산과 함께 카운터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시 스윗한 나라. 아주 좋아. 유럽에선 상상도 못할 이런 서비스에 또 감동하고. 공항에서 환전했던 태국 지폐를 꾸깃꾸깃 꺼내 남은 요금을 결제한 다음 방으로 올라갑니다. 어두워서 확실하진 않지만 작은 숲속 오두막 같은 느낌이 나는 곳 같습니다. 방문을 열었더니 뜨거운 공기가 훅 끼칩니다. 바로 에어컨을 켜고 상쾌해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와, 한여름 같습니다. 한국은 봄이었는데 비행기 몇 시간을 타면 계절을 한 단계 먼저 느낄 수 있다니. 이래서 여행이 좋죠. 내일을 위해 간단히 씻고 얼른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갑니다. 방에서는 태국 냄새가 났습니다. 뭐라 정확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과하게 달달한 꿀 냄새 같은 느낌. 자스민 꽃향기 같기도 하고. 천장을 보며 내일 어디서 어떻게 뭘 할지 간단하게 그려 봅니다. 그리고 믿음직스러운 내일의 나에게 미뤄 보는 이 질문. 아까 엉망으로 쓴 마지막 문단 내일 예쁘게 완성할 수 있겠지?

여름 여름 여름! 내일도 무사하길.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위험을 맞닥뜨린 다음 편도 to be continued . . .

p.s. 260702 새로운 홈페이지를 만들고, 첫 아티클 마감한 날! @home. 노트: 스탠드포인트 레브리